삼공일 삼공이(301 302)를 봤다
나는 어지간히 핫한 작품이 아니라면 검증된 작품을 즐기는 편이다. 특히 영화는 가끔 엄청 오래된 작품을 보기도 하는데, 오늘이 딱 고전 띵작이 땡기는 날이었다.
301 302
그런데 유튜브에 301 302가 대놓고 올려져 있는 게 아닌가? 게시자마저 한국영상자료원으로, 합법에 정식 버전이 확실해 보였다. 이거 못참지!
삼공일 삼공이는 아주 옛날부터 알던 영화다. 나는 어릴 때 과학동아 잡지를 많이 봤는데, 거기서 접한 것이 처음이었다. 무슨 정신병 관련 영화 소개였나.. 그리고 아는 사람이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것 또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언젠가는 봐야지.. 하고 기대하던 영화였다. 물론 그래서 대강의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치킨을 시켜놓고(!) 영화를 틀었다.
역시 오래된 영화이긴 하다
21세기의 자극적인 영상과 연출에 익숙한 우리는 과거에 쇼킹했다던 영화를 봐도 그저 그런 경우가 많다. 나는 매드맥스 시리즈를 전부 보고 느꼈던 감상이 그랬다: 매드맥스 2는 액션 영화에 한 획을 그은 엄청난 걸작이라더니.. 그냥 그저 그런데? 그 당시에 직접 봤다면 또 달랐겠지만..
21세기에 봐도 세련되거나 공감할 정도의 영화는 정말로 시대를 앞서나갔거나,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장면을 그렸거나, 그냥 만든지 얼마 안 된 것(최소 90년대 이후)들이 많았다 - 큐브1, 터미네이터2(90년대 이후 영화), 할로윈1, 스탠리 큐브릭 영화들(그냥 존나 쎔) 등등
이 영화는 시대적 배경을 느끼게 해 주는 부분이 참 많았다. 그 땐 그랬지..
"애완견을 요리한 게 왜 이혼 사유가 되지?"
- 네, 실종 신고자의 말로는 앞집 여자가 말입니다. 그 개를 죽인적이 있다는데요
- 개? 아니, 개가 왜?
- 그 주민들한테 알아 봤는데요, 그 여자가 그 애완견을 요리해서요.
남편에게 먹였답니다
- 아, 그래서 이혼을 당했답니다
-
그게 왜 이혼 사유가 되지?
이거 말고도 서양인이라면 충격 먹을 장면이 수두룩하다
시장 개고기
개고기가 시장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다. 어메이징.. 저런 걸 안 하게 된 건 88년 올림픽 이후인가? 아님 2002 월드컵 이후인가?
다만 애완견을 먹는 장면은 충격이 별로 없었다.
- 내용을 좀 알고 있던 나는 남편이 처음 나오는 장면에서 둘이 너무 친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개고기 먹은 걸 대놓고 말하고 티키타카가 될 정도라니. 개를 애지중지한다면 가족을 삶아 먹은 급인데 반응이 좀 이상했다.
- 게다가 밥을 꿀맛으로 먹는 장면이 나오다가 자기가 키우던 개인 걸 알고 엄청난 충격에 토하고 지랄 발광하는 걸 기대했으나, 영화는 개 머리통이 삶아지고 있는 냄비 정도의 소품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충격을 주려 한다. 솔직히 아쉬웠다. 좀 더 나갈 수 있는데 참은 걸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는 키우던 개를 먹는 거야 대단한 게 아닐 수 있다. 사실 옛날에는 가축이 죽으면 먹는 건 당연했다.
- 내가 아는 좀 옛날 사람인 부부도 애완견 진돗개가 병사하자, 밥만 주던 부인은 보신탕을 해볼까? 제안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똥오줌 누이고 관리하고 병원 가서 광견병 주사 맞히는 등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남편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텃밭에 묻었다고 한다.
- 요즘의 몇몇 애견인들에게 애완견을 먹는 건 완전히 미쳐버린 식인 수준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농촌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개는 소 돼지와 다를 바 없는 가축이었고, 가축이 죽는 날은 고기를 즐기는 날이었다.
털뽑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깔깔깔
- 근데, 어떻게 쫑쫑이(개)를 요리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요리를 하다 보면 계속 새로운 재료가 필요하잖아. 오늘은 뭘하지? 하면서
-
털뽑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웃음)
-
겨우 털을 다 뽑고, 머리통까지 잘라버리고 나니까 남는 건 정말 별거 아니더라고...
- 왜~ 알잖아 말티즈.. 그래서 생각하다가 수플레를 만들었는데, 한 사람 먹기에는 딱 맞더라구요~
하지만 301녀의 이 정신 나간 대사는... 이 여자 사이코패스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당신을 위한 요린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 윤희(302)씨를 위한 요린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새로운 어떤 재료도 없어..
- 그 때.. 쫑쫑이, 많이 고통스러웠을까?
- (놀라면서 윤희를 바라본다)
- 어때요? 이렇게.. 나 아직 살아 있어요(뒤돌아서서 나체를 보여준다)
- 왜요? 맛이 없을 거 같아 보여요?
전체적으로 301녀가 공격(음식 제공)하고 302녀가 방어(먹고 토하기)하는 느낌이고, 개 요리 이야기를 보면 301녀가 좀더 적극적으로 맛이 간 듯이 보인다. 그런데 마지막의 마지막에, 302녀가 자기 자신을 요리해달라는 장면에서는 천하의 301녀도 놀라며 긴장하는 것이 재미있다. 대놓고 미친 301녀가, 겉보기엔 정상이지만 속은 완전히 미쳐있는 302녀의 진짜 광기에 눌려버린 게 재미있다.
그리고 또 아쉬웠던 점
301 302의 배우 캐스팅도 약간 안 맞는 면이 있다. 걍 두 분 다 너무 고우시달까? 301녀는 방은진씨보다 더 살집 있는 여배우를 하고, 살이 찐 장면은 더욱 대놓고 못생기고 뚱뚱한 추녀로 분장(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처럼)을 하는 게 좋았을텐데, 그러지 않아서 아쉽다. 그래서 301녀의 엄마가 살 좀 빼라는 타박이 그다지 와닿지 않는 점이 있다(아니 여전히 고우신데?)
그래서 남편 새끼는 뭐가 문제인지 제발로 복을 걷어 차는 것처럼 보여 이해하기 힘들다. 저녁에는 맛있는 밥을 마음껏 먹고 밤에는 이쁜 와이프랑 마구 해댈 수 있는데 대체 뭐가 불만일까? 솔직히 나도 섹1스까진 바라지도 않으니까 누가 밥 좀 해 주면 좋겠다.. 존나 부러운 새끼 굴러들어온 복을 발로 차네
물론 이해할 수는 있다. 성욕도 식욕도 덜 한 사람이 있고, 301녀처럼 아주 왕성한 사람도 있다. 그게 안 맞는 사람들끼리 억지로 같이 살면 결국 그렇게 된다. 그리고 20세기 시대 상황 상 누구나 결혼을 하는 시대였고, 잘 안 맞는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요즘 황혼 이혼이 많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보자마자 이해할 수 있고 오히려 남편에게 공감할 수 있는 정도여야 했을 것이다. 그 점이 아쉬웠다.
또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기 힘들던 한국의 80~90년대였기에 301녀가 그렇게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301녀가 요즘 시대를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지울 수 없다. 만일 그녀가 잘나가는 식당 사장인데다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면, 낮에는 고객을 만족시키는 요리를 마구 만들어 먹여대다가 밤에는 남자를 마구 먹어치우는 최상위 포식자였을 것이다. 그런 포텐셜이 보이는 사람을 집 안에 가둬 놓고 남편 한 사람에게만 매달리게 했으니.. 결혼 생활이 파탄 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래서 301녀의 이혼 썰은 저 시대가 아니면 성립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302녀에 대해서는, 역시 옛날 영화라 그런지 아쉽긴 하다. 미성년자가 강간을 당하는 장면에 아동이 죽는 장면까지 묘사되는데 그렇게 역겹지도 두렵지도 모골이 송연해지지도 않는다. 당신은 "저 여자가 어릴 때부터 의붓아버지한테 강간 당하는 날마다 진수성찬을 먹여서 거식증이래"라는 문장을 보고 공감이라던가 어떤 뭐가 느껴지는가? 내게는 이 정도의 밋밋한 화면이었다. 옛날 영화이고 내가 망가든 영상이든 자극적인 작품을 너무 많이 본 것이 문제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302녀를 분한 황신혜씨가 한 시대를 풍미한 미녀 여배우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냥 캐스팅이 좀 안 맞기도 했다. 거식증 환자인데다 밥을 거의 못 먹는데도 몸매가 너무 좋은 게 말이 안 된다.
특히 최후반부에 자신의 전라를 301녀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물론 관객들도 같이 본다) 이런 걸 바라긴 힘들지만, 콘크리트 아일랜드의 크리스찬 베일 수준의 미라 같은 몸매였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지,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이 얼마나 사람을 망가뜨렸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일텐데, 거기에 301녀를 유혹하는 듯한 약간의 에로티시즘을 곁들일 수 있었다면 완벽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몸매가 너무 좋아서 음.. 그냥 좀 숭한 느낌만 들 뿐이다.. 사실 그걸 노린 것이 맞다. 몸을 죄다 까놓고 나를 먹어 주세요 하는데 그게 야하지 않을 수 있는가(이걸 좀 동성애적으로 해석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 대조되는 앙상한 몸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맺음말: 그래도 띵작이야..
이거 저거 아쉽긴 해도 나름 재미 있는 영화였다. 아니 재미가 있다기보단 뭐라 해야 할까.. 컬트적으로 끌린다고 할까..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대체 컬트란게 뭘까 궁금했는데, 이걸 보고 나면 이 영화를 표현할 단어가 컬트 말고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튼 아주 독특한 매력이 있는 영화임은 분명하다.
누군가 한계까지 밀어 붙이는 수준으로 리메이크해주면 좋겠다만..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니면 엄청난 연출력과 만력을 가진 망가 작가가 십몇부작 동인지라도 내주면 좋겠다. 모에(?) 요소나 팔아먹을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301녀 302녀의 미묘한 백합 느낌도 좋고(조금만 상황이 좋았어도 절친이 되지 않았을까?), 302녀의 실종을 조사하는 형사 입장에서 미스테리 스릴러 느낌도 낼 수 있다. 억압 받는 두 여성의 이야기니 페미니즘도 되고, 301녀와 전남편의 섹스 장면도 있어서 포르노로 팔아먹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니 있을 거 다 있네!
야한 건 망가로 너무 많이 봤고.. 무서운 건 호러 게임을 너무 많이 했더니 어지간한 건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끝까지 간다, 기생충, 추격자 같은 잘 짜여진 스릴러는 여전히 그런 쪼이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거 같긴 한데.. 어허 참.